팬덤의 보호 심리 (양육자 팬덤, 유사 연애, 경계선)
솔직히 저는 HOT 팬이었던 시절, 제가 왜 그렇게 오빠들을 지키려 했는지 당시엔 몰랐습니다. 주변 어른이 HOT를 비판하면 마치 친동생 칭찬받게 하려는 것처럼 장점을 줄줄 늘어놓았고, 해체 소식에는 소속사 앞에서 흰 풍선을 흔들었습니다. 그 감정이 단순한 팬심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는 한참 지나서야 정리가 됐습니다. 팬이 아이돌을 보호하려는 심리가 어디서 비롯되는지, 그리고 그 감정이 어디까지 가면 위험해지는지 정리해 봤습니다.
양육자 팬덤, "내가 키운 내 새끼"
양육자 팬덤(Parental Fandom)이란 단순히 아이돌을 응원하는 수준을 넘어 그 사람의 인기와 커리어를 팬이 직접 만들어 준다는 인식을 갖고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팬층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저 가수가 지금 자리에 있는 건 내가 키웠기 때문"이라는 자부심이 행동의 원동력이 되는 겁니다.
저도 HOT 활동 당시에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아직 10대 아이돌이라는 개념이 낯설던 시절, 어른들이 "저게 무슨 가수냐"며 핀잔을 줄 때마다 제가 직접 나서서 HOT의 음악성과 무대 실력을 설명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건 팬심이기도 했지만 "이 사람들을 제대로 알아줬으면 한다"는 일종의 보호 본능이었습니다.
이 심리는 최근 케이팝 팬덤에서 훨씬 조직화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총공(総攻)이란 자신이 지지하는 아이돌의 순위와 인지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팬들이 집단적으로 동시에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음원 스밍(Streaming), 즉 스트리밍 지수를 올리기 위해 여러 계정으로 반복 재생하는 행위부터 차트 순위를 올리기 위한 투표 총공까지 그 방식은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습니다. 사무총장과 부회장이 있는 위계 조직을 만들고 전략을 하달하는 방식은 팬클럽이 아니라 선거 캠프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연간 음반 판매량을 보면 이 현상이 얼마나 거대한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2013년에는 약 826만 장이었던 케이팝 음반 판매량이 2021년에는 5,700만 장을 넘어섰습니다. 스트리밍 시대에 역행하는 이 수치는 한 팬이 100장, 200장씩 구매하는 구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팬사인회 당첨 확률을 높이기 위해 음반을 쌓아놓는 팬들의 행동은 게임사에서 아이템 확률을 낮게 설정해 반복 결제를 유도하는 방식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습니다.
유사 연애 감정,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
유사 연애 감정(Parasocial Romance)이란 실제 관계가 없는 상대, 즉 연예인이나 BJ 등 미디어 속 인물에게 마치 연인 관계처럼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심리 상태를 뜻합니다. 일방적인 관계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실제 감정만큼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여성 팬이 남성 아이돌에게 더 강하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는 통계에서도 확인됩니다. 보이그룹의 음반 초동 판매량이 걸그룹을 압도적으로 앞서는 상황은 10년 이상 이어져 왔고, 주요 엔터사의 재무제표를 보면 남성 아이돌 그룹의 매출 기여도가 훨씬 높습니다. 저도 HOT 팬이었던 당시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남자 아이돌을 따라 소속사 앞에서 밤을 지새우는 여학생들은 수없이 봤지만, 반대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 비율 차이는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감정의 배경을 설명하는 시각은 여러 가지입니다.
- 여성 팬들은 심리적 유대감과 감정 이입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것이 유사 연애 감정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 남성 팬들은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욕구 충족에 더 반응하는 경향이 있어, 음지화된 플랫폼에서도 유사 연애 감정이 발동되는 경우가 많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 고립과 은둔 청년의 증가가 이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고립·은둔 청년은 2019년 34만 명에서 2021년 53만 8천 명으로 급증했으며, 이후에도 증가 추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프라인 관계를 포기한 자리를 아이돌이나 BJ와의 가상 관계가 채우고 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출처: Youtube)
저는 세 번째 시각이 가장 현실에 가깝다고 봅니다. 은둔하면 자연스럽게 인터넷에 머무는 시간이 늘고, 그 공간에서 감정을 쏟을 대상을 찾게 됩니다. 팬덤이 그 수요를 정확하게 흡수하고 있는 구조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줄어든 만큼 상상된 관계에 의존하는 강도는 더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에서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 수록된 팬덤 연구들도 유사 연애 감정이 개인의 심리적 공백을 채우는 보상 기제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감정 자체가 아니라, 그 강도가 어느 선을 넘느냐입니다.
경계선을 넘으면: 보호에서 집착으로
저한테 가장 충격적으로 남아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HOT 팬이었던 시절, 간미연과 문희준의 열애설이 터졌을 때 일부 팬들이 간미연에게 혈서를 보내거나 편지봉투 안에 면도칼을 넣어 다치게 만들거나, 눈을 도려낸 사진을 보내 협박했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듣고 말 그대로 멍해졌습니다. 오빠를 지키고 싶었던 마음이 어떻게 저런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지 그때는 이해가 안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보호 심리가 아니라 소유 욕구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은 감정과 그 사람을 나만의 것으로 두고 싶은 감정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후자는 상대가 내 기대 안에 있기를 요구하는 마음입니다.
스토킹(Stalking)이란 상대의 의사에 반해 지속적으로 접근하거나 위협을 가하는 행위로, 팬덤에서 이를 사생팬(私生fan) 행동이라고도 부릅니다. 사생팬 행동은 유사 연애 감정이 경계선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입니다. 아이돌의 사생활을 무단으로 추적하고 일정을 유출하며 접근을 시도하는 행동은 팬심이 아닌 명백한 범죄입니다.
엔터사들이 이 구조를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만들어 왔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팬사인회 당첨을 위해 음반 수십 장을 사야 하는 구조, 레어 기회(Rare Opportunity), 즉 팬이 아이돌과 직접 만날 수 있는 희귀한 접촉 기회를 고액 구매와 연동시켜 더 많은 소비를 유도하는 방식은 팬들의 보호 본능과 소유 욕구를 동시에 자극합니다. 이 방식이 팬들을 더 극성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는 시각도 분명히 있습니다.
저는 이게 전적으로 엔터사의 문제라고만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팬덤의 보호 심리 자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하지만 그 감정이 현실의 인간관계를 대체할 정도로 강해지거나, 상대를 나만의 것으로 묶어두려는 방향으로 흐를 때 문제가 생깁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은 아름다운 감정입니다. 저도 그 마음으로 HOT를 응원했습니다. 다만 그 감정이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상대가 내 기대와 다른 모습을 보이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좋아하는 마음과 소유하려는 마음을 스스로 구분하는 것, 그게 팬 문화가 지속 가능해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라고 생각합니다. 관심을 갖는 아이돌이 있다면 그를 응원하되, 그 에너지의 일부를 오프라인의 실제 관계에도 써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