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 소통의 진화 (팬레터, 플랫폼, 양방향)
예전에 친구가 좋아하던 아이돌에게 주기도문을 전지 크기로 일일이 파서 선물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순수했던 시절이었죠. 요즘은 그런 정성이 담긴 팬레터보다 앱으로 메시지 몇 자 보내는 게 더 일상적인 소통 방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HOT 팬이었던 1990년대 후반과 지금의 팬덤 문화를 비교해보면, 소통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 걸 실감하게 됩니다.
팬레터로 시작된 소통의 역사
제가 십 대였던 그 시절, 좋아하는 아이돌과 소통하는 방법은 딱 하나였습니다. 바로 팬레터였죠. 예쁜 편지지를 고르고,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마음을 담아 쓴 다음, 소속사 주소로 보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편지를 최애가 볼지 안 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저 봐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체통에 넣을 때의 설렘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1990년대 후반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다음 팬카페가 등장했습니다. 이때부터 온라인 기반 소통이 본격화됐는데,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변화였죠. 2000년대 중반에는 싸이월드가 유행했습니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미니홈피에 일촌신청을 걸어보고, 안 될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실제로 제 주변에는 최애 아이돌 집 앞까지 찾아갔던 친구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당시엔 유명 아이돌의 집 주소가 거의 공개되다시피 했고, 집 앞에서 기다리는 팬들 때문에 주변 주민들이 불평하는 일도 흔했습니다.
플랫폼 시대, 실시간 양방향 소통의 시작
2015년 네이버가 선보인 브이라이브(V LIVE)는 팬덤 소통의 새로운 전환점이었습니다. 아티스트가 원하는 시간에 라이브 방송을 켤 수 있고, 팬들은 실시간으로 댓글을 남길 수 있게 된 것이죠. 브이라이브는 한때 유료 구독자 100만 명, 글로벌 다운로드 1억 건을 돌파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습니다. 여기서 '실시간 소통'이란 아티스트와 팬이 동시간대에 같은 공간에서 메시지를 주고받는 형태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TV 생방송처럼 지금 이 순간 서로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소속사들이 직접 만든 팬 플랫폼이 주류가 됐습니다. 하이브의 위버스(Weverse), SM 자회사 디어유(Dear U)의 버블(Bubble)이 대표적이죠. 위버스는 월간 활성 사용자 수(MAU)가 1천만 명에 달하며, 커뮤니티 형태로 운영됩니다. 아티스트가 올린 게시글에 팬들이 댓글을 달 수 있고, 반대로 팬들의 글에 아티스트가 댓글을 남기기도 합니다. 2024년 4분기부터는 위버스 DM이라는 1대1 유료 메시지 서비스도 시작됐습니다.
버블은 1대1 메시지 방식의 원조 격입니다. 아티스트와 프라이빗하게 메시지를 주고받는 구조인데, 2024년 기준 분기별 유료 구독자 평균이 292만 5천 명에 이릅니다. 올해 3월에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베리지(Verge)라는 새 플랫폼을 출시하며 후발 주자로 뛰어들었습니다. 베리지는 팬 포스트, 응원 메시지, 미디어 콘텐츠 등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통합 공간으로 기획됐다고 합니다(출처: 카카오 공식 발표).
이런 플랫폼들의 핵심 경쟁력은 결국 '어떤 아티스트가 입점해 있느냐'입니다. 위버스에는 BTS, 세븐틴,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엔하이픈, 르세라핌 같은 하이브 소속 아티스트와 블랙핑크 등 YG엔터 아티스트가 많습니다. 버블은 NCT, 에스파 등 SM 아티스트와 트와이스, 스트레이키즈 같은 JYP 아티스트가 주로 활동하죠. 베리지는 아이유, 아이브, 몬스타엑스 등이 입점해 있으며, 아이유가 커뮤니티를 오픈한 5월 13일에는 서버가 다운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양방향 소통의 명과 암
솔직히 저는 이런 플랫폼들이 처음 나왔을 때 신기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제가 팬이었던 시절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직접 써보니 장점만 있는 건 아니더군요. 아티스트가 팬들의 응원 메시지를 보고 힘을 얻는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플랫폼에 얼마나 자주 나타나느냐가 '성실함'이나 '팬 사랑'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특히 버블처럼 유료 서비스의 경우, 팬들이 아티스트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소통을 요구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2023년 걸그룹 (여자)아이들의 전소연이 생일에도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팬들의 서운함이 SNS에 쏟아진 적이 있었죠. 개인적으로는 이런 부분을 회사가 아티스트에게 미리 안내해줬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유료 구독 모델은 일종의 '소통 계약'이라는 인식을 팬들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플랫폼이 '소통 수단'을 넘어 '감시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공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평가받습니다. 뉴진스의 다니엘은 설날 인사를 '해피 차이니스 뉴 이어(Happy Chinese New Year)'라고 적었다가 논란이 일어 사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음력 설날을 지칭할 때는 '해피 루나 뉴 이어(Happy Lunar New Year)'라고 해야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기 때문이죠. 최근 대선 시기에는 카리나가 빨간색 점퍼에 '1번'이 적힌 옷을 입었다가 특정 정당 지지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라이브 방송의 경우 더 심각합니다. 말 한마디가 잘못 나가면 바로 '박제'돼서 쇼츠나 클립 영상으로 계속 재생산됩니다. 특정 장면을 악의적으로 편집한 영상이 돌아다니면서 오해가 확산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문제가 있다고 해서 요즘 팬들의 아이돌을 향한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다거나 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얼마 전 한터글로벌 콘서트에 갔을 때, 공연이 끝나고 주차장 출구 쪽에 팬들이 모여 있는 걸 봤습니다. 다들 한 손에 편지나 선물을 들고 좋아하는 가수가 나오길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 모습을 보면서, 팬들의 순수한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심이 부담이 되지 않으려면
팬 플랫폼은 계속 진화하고 있습니다. 올해부터는 위버스, 버블, 베리지 등 삼파전 구도가 형성됐죠. 하지만 편리함을 위해 만든 장치가 오히려 형식적인 소통의 틀에 아티스트와 팬 모두를 가두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특히 악플 문제는 심각합니다. 프로미스나인의 최영이 라이브 방송 중 멤버에 대한 악의적인 댓글을 보고 눈물을 보인 적도 있습니다(출처: 네이버 뉴스). 실시간으로 필터 없이 올라오는 댓글 때문에 아티스트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요즘 소통 방식이 예전보다 가볍게 느껴지는 건 사실입니다. 앱으로 몇 자 쓰는 게 전부니까요.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이게 과하거나 잘못되면 악의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고, 악플도 너무 쉽게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됩니다. 다음은 팬덤 소통에서 주의해야 할 점들입니다.
- 유료 플랫폼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인 소통을 요구하지 않기
- 아티스트의 사생활과 개인적 견해를 존중하기
- 실시간 댓글이나 메시지를 남길 때 한 번 더 생각하기
- 편집된 영상이나 단편적인 장면만 보고 판단하지 않기
저는 아이돌을 좋아하는 마음이 때로는 제 마음의 돌파구가 되고, 스트레스 해소가 되며, 안정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최애를 응원하는 예쁜 마음을 유지하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그들을 좋아하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말이죠. 팬 플랫폼이 본래의 목적대로 부담 없이 진심 어린 대화가 오가는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려면 팬도, 아티스트도, 그리고 플랫폼을 운영하는 회사도 서로를 배려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 참고: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