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없던 시절 팬질 방법 (녹화, 사서함, 오프라인)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HOT 팬이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유튜브도 없었고, 인터넷이라는 것도 일반 가정에는 거의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있어봤자 PC통신이 전부였는데, 전화선으로 연결해서 하는 방식이라 저는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HOT를 접할 수 있었던 방법은 TV, 라디오, 잡지, 그리고 콘서트가 전부였습니다. 요즘 분들이 들으면 답답해서 어떻게 팬질을 했을까 싶겠지만, 그때는 그때만의 낭만이 있었습니다.

인터넷 없던 시절 팬질 방법

비디오 녹화와 카세트테이프 녹음

요즘은 유튜브를 통해 다시보기는 물론 개인별 영상까지 무한 반복으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때는 방송에서 한 번, 재방송으로 한 번 하는 것을 챙겨보지 못하면 다시 볼 방법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소에도 영상을 계속 보고 싶어서 HOT 방송 스케줄을 미리 확인한 다음, 방송 시작 전에 TV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HOT가 나오는 순간 바로 녹화 버튼을 눌렀습니다. 이런 식으로 모은 비디오테이프가 집에 수십 개는 되었던 것 같습니다.

라디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라디오는 보통 저녁 8시 타임이나 10시 타임에 아이돌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때는 제가 중고등학생이었으니 엄마가 공부하라고 하셨겠죠. 게다가 밤 10시면 잠을 자야 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라디오 소리를 최대한 줄인 다음 카세트테이프로 녹음을 했습니다. 나중에 들을 때 크게 틀면 되니까요. 그렇게 녹음해서 학교 가서 친구들과 같이 듣곤 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때 SBS 라디오가 부산에서는 수신이 안 됐는데 저희 집이 18층이었거든요. 저희 집에서는 그게 터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녹음한 것을 친구들에게 빌려주기도 했고, 친구들 사이에서 나름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런 녹화와 녹음 활동을 팬덤 아카이빙(Fandom Archiving)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팬덤 아카이빙이란 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자료를 직접 수집하고 보관하는 활동을 뜻합니다. 요즘은 팬 사이트나 유튜브에 자료가 자동으로 축적되지만, 그때는 개인이 직접 발로 뛰며 자료를 모아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번거롭지만, 그만큼 하나하나가 소중했던 것 같습니다.

사서함을 통한 스케줄 확인

그렇다면 방송 스케줄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 당시에는 사서함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서함이란 전화로 연결해서 녹음된 음성 메시지를 듣는 시스템인데, 요즘의 자동응답 서비스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사서함에 전화를 하면 팬클럽 회장이 직접 녹음해둔 HOT 공식 스케줄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날 어떤 방송에 나오는지, 몇 시에 녹화가 있는지 같은 정보를 미리 알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지방마다 팬클럽 회장이 따로 있었고, 사서함도 따로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방 스케줄이 있으면 그것도 별도로 알려주곤 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 중 하나는, 그 당시 전북 club HOT 회장이 남자였다는 사실입니다. HOT 팬들은 대부분 여자였는데 남자 회장이라니, 뭔가 신기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씩 전북 사서함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순수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사서함 시스템은 일방향 커뮤니케이션(One-way Communication)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방향 커뮤니케이션이란 정보를 제공하는 쪽과 받는 쪽이 명확히 구분되어, 쌍방향 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형태를 말합니다. 요즘은 팬 플랫폼이나 SNS를 통해 아이돌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지만, 그때는 그저 일방적으로 정보를 받기만 해도 감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잡지 수집과 오프라인 팬클럽 활동

저는 HOT가 나오는 잡지는 거의 다 샀습니다. 친구들과 나눠서 사기도 했는데, HOT가 나오는 페이지는 파일에다가 정리해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크랩북 같은 거였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모아서 정리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팬 활동이었고, 그 속에서 우정도 쌓였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 한 번이면 내 스타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때는 이렇게 하나하나 직접 손으로 모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팬클럽 활동도 오프라인 위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드림콘서트 전에 "오빠들에게 줄 간식 준비할 사람 모여라"라는 공지가 나오면 다 같이 모여서 준비했습니다. 지금의 조공 도시락이나 조공 커피차의 시초가 바로 이런 활동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때는 팬들끼리 직접 만나서 준비하고, 함께 응원하는 문화가 강했습니다. 어쩌면 온라인보다 오프라인이 더 중심이었던 시절이라 팬들끼리의 유대감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건, 서울에서 팬미팅이 있다고 하면 지방에서 수십 대의 버스를 대절해서 줄지어 서울로 올라갔다는 점입니다. 저도 몇 번 참여했었는데, 버스 안에서 친구들과 함께 HOT 노래를 부르고 응원 구호를 연습하면서 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때의 뿌듯함과 설렘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대규모 오프라인 활동을 집단적 팬덤 행위(Collective Fandom Practice)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집단적 팬덤 행위란 팬들이 집단으로 모여 아이돌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활동을 의미합니다. 요즘도 콘서트나 팬미팅에 가지만, 그때는 이동 자체가 하나의 이벤트였고 함께한다는 느낌이 훨씬 강했습니다.

  1. 비디오 녹화와 카세트테이프 녹음으로 방송 자료 수집
  2. 사서함 전화로 스케줄 확인 및 팬클럽 소식 듣기
  3. 잡지 수집 및 스크랩북 정리
  4. 오프라인 팬클럽 모임에서 조공 준비
  5. 대절 버스 타고 서울 팬미팅 참석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향한 마음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그 방법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지금의 팬들이 들으면 그때는 답답해서 어떻게 팬질을 했을까 싶겠지만, 그때는 그만의 낭만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팬 플랫폼이나 팬 사인회 등으로 아이돌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자리가 많지만, 그때는 공개방송 이외에는 가까이서 볼 기회나 소통할 수 있는 자리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돌은 친근하지만 우상적인 존재가 되었고, 팬들끼리 더 단합하고 으샤으샤하는 느낌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쌍방향 소통은 전혀 바라지도 않았고, 만약 응답해 준다면 그야말로 성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바라만 봐도 좋았던 것이 그 당시 팬질이었고, 그래서 더 열정적이고 간절했던 것 같습니다. 콘서트 할 때마다 항상 몇 명이 실신했다는 소식이 들릴 정도였으니까요.

--- 참고: EBS Culture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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