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과 돈 관리 (굿즈소비, 팬덤중독, 지출한계)
팬사인회 한 번 응모하는 데 250만 원, 떨어지면 그냥 날린 돈.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저도 순간 "설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덕질하는 마음은 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HOT 팬이었던 시절, 피아노 학원비를 몰래 잡지와 사진 사는 데 썼던 게 문득 떠올랐거든요. 덕질과 돈 관리가 왜 이렇게 어렵게 엮이는지, 이제 제 경험과 요즘 팬덤 문화를 함께 놓고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팬덤 소비가 중독과 닮아있는 이유
덕질을 단순한 취미라고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팬덤 소비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도박이나 게임 과금과 구조적으로 상당히 비슷합니다.
팬사인회 응모 방식을 예로 들어봅니다. 앨범이나 굿즈를 대량 구매해야 응모 기회가 생기는 이 방식을 업계에서는 '무작위 보상 시스템(Variable Ratio Reinforcement)'이라고 부릅니다. 무작위 보상 시스템이란, 보상이 언제 올지 예측할 수 없어서 오히려 소비 행동을 멈추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를 뜻합니다. 슬롯머신과 동일한 원리입니다. 이번엔 될 것 같은 기대감이 반복 소비를 부릅니다.
랜덤 포토카드(Random Photocard)도 마찬가지입니다. 랜덤 포토카드란, 앨범 구매 시 어떤 멤버의 카드가 나올지 알 수 없게 설계된 수집형 아이템입니다. 원하는 멤버의 카드를 얻기 위해 같은 앨범을 수십 장씩 사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유도됩니다. 제가 HOT 팬이었던 시절에는 이런 랜덤 요소가 없었는데, 지금 팬들이 더 많은 돈을 쓸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게 된 데에는 이 설계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자료에 따르면 충동 억제 장애와 과소비 행동은 도파민(Dopamine) 보상 회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도파민 보상 회로란, 기대와 보상이 반복될 때 뇌가 그 자극을 계속 추구하도록 유도하는 신경 메커니즘을 말합니다. 팬사인회 추첨 결과를 기다리는 그 설렘 자체가 이미 뇌를 자극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직접 겪은 굿즈 소비의 민낯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HOT 팬으로 활동했던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당시에 제가 얼마나 비이성적으로 소비했는지 새삼 놀라게 됩니다.
피아노 학원비를 슬쩍 빼돌려 잡지와 브로마이드를 샀습니다. 학원은 빠지고 돈은 어떻게든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부모님께 들켰을 때 혼이 얼마나 났는지,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오빠들 잡지는 다 모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거든요.
중학교 때는 드림콘서트 서포트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적도 있습니다. 팬클럽에서 HOT 멤버들에게 보낼 식사와 음료를 준비할 사람을 모집했는데, 그냥 물이나 음료만 준비해도 됐을 일을 저는 거금을 들여 큰 꽃바구니로 포장했습니다. 오빠들한테 가는 거니까 이왕이면 예쁘게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단순한 소비가 아니었습니다. 감정이 소비를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감정은 지금도 팬덤 안에서 똑같이 작동합니다. 오히려 지금은 그 감정을 자극하는 굿즈의 종류가 훨씬 다양해졌습니다.
올콘 문화와 팬사인회 응모, 어디까지가 정상인가
요즘 팬덤 문화에서 '올콘(All Concert)'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올콘이란, 같은 아티스트의 한 투어 내 모든 회차 공연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것을 뜻합니다. 서울에서 금토일 3회차를 하면 3장, 해외 공연까지 쫓아가면 비행기값까지 더해집니다. 이걸 당연한 듯 여기는 분위기가 생겼습니다.
팬사인회 응모 구조는 더 문제적입니다. 한 번 응모에 수백만 원을 쓰고도 떨어질 수 있고, 받은 앨범은 집에 쌓이거나 처치 곤란이 됩니다. 앨범을 아예 수령하지 않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입니다. 이쯤 되면 앨범이 음악을 듣기 위한 것인지, 응모권을 얻기 위한 소모품인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덕질 소비가 문제가 되는 패턴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 팬사인회 응모를 위해 자신의 월 수입을 초과하는 앨범 및 굿즈를 구매하는 경우
- 콘서트 원정을 위해 학업이나 직장 일정을 반복적으로 희생하는 경우
- 카드론(Card Loan), 즉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나 단기 대출로 덕질 비용을 충당하는 경우
- 소비 사실을 가족이나 주변에 숨기며 지출 규모를 은폐하는 경우
- 빚이 쌓이는 줄 알면서도 다음 일정 티켓을 먼저 끊는 경우
이 중 두 가지 이상이 해당된다면, 덕질이라는 이름의 취미가 아닌 충동 조절 문제(Impulse Control Disorder)로 접근해야 할 수 있습니다. 충동 조절 문제란, 스스로 행동을 멈추고 싶어도 멈추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덕질을 그만두고 싶다면서 비행기를 먼저 끊어놓는 행동이 바로 이 패턴에 해당합니다.
덕질을 좋아하는 마음 자체는 전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감당 안 되는 소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면,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보건복지부에서 운영하는 중독 관련 지원 체계에는 도박, 알코올, 인터넷 중독 센터가 포함되어 있는데, 팬덤 과소비처럼 유사한 패턴을 보이는 경우도 상담 연계가 가능합니다.
지출 한계를 스스로 설정하는 것이 진짜 팬심인가
덕질에도 한계선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쓰는 것도 팬의 권리라고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이 두 시각 모두 이해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팬십(Fandom)이란, 아티스트에 대한 애정과 지지를 표현하는 팬 문화 전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면서까지 소비하는 것이 과연 그 아티스트가 원하는 응원 방식일지, 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오히려 아이돌 입장에서 그런 팬을 어떻게 볼지 생각해보면, 감사함과 동시에 걱정스러움이 공존할 것 같습니다.
소비 지출 한계를 설정한다는 게 덕질을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덕질하면서 좋아하는 감정은 오롯이 자기 것입니다. 굿즈가 없어도, 팬사인회에 가지 못해도, 그 마음은 어디 가지 않습니다. 제가 HOT를 좋아했던 기억이 잡지 몇 권에 달린 게 아니었던 것처럼요.
남들이 다 올콘 한다고 따라가야 한다는 압박, 남들이 다 팬사인회 응모한다고 나도 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소비를 부추깁니다. 이 문화적 동조 압력(Social Conformity Pressure)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소비 패턴을 점검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동조 압력이란, 주변의 행동이나 기대에 맞추려는 심리적 압박을 뜻합니다.
덕질했던 순간이 나중에 소중한 추억이 되려면, 그 순간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합니다. 빚을 갚으면서 뒤돌아보는 덕질은 추억이 아니라 후회가 되기 쉽습니다. 저도 피아노 학원비를 몰래 쓴 그 날은 한동안 떠올리기 부끄러웠습니다. 덕질을 오래, 건강하게 즐기고 싶다면 지금 내 통장에서 나올 수 있는 돈의 범위 안에서 하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좋아하는 마음을 잘 지키는 것도 팬십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금융 또는 심리 상담 조언이 아닙니다. 소비 조절이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전문 상담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시길 권합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q7-9E94jfH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