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팬덤 vs 지금 팬덤 (팬덤문화, 티켓팅, 응원봉)

 

콘서트 티켓을 사려고 은행 앞에서 밤을 새운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있습니다. HOT 팬이었던 시절, 제일은행 앞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해가 뜨기를 기다렸습니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고, 오히려 그 과정이 설레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면 후배 팬들이 믿지 못하더군요. 1세대 팬덤과 지금 팬덤, 겉으로 보면 같은 덕질인데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1세대 팬덤의 모습

팬덤문화가 처음 만들어지던 시절의 풍경

1990년대 후반, 한국에서 아이돌 팬덤(fandom)이라는 개념이 처음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팬덤이란 특정 가수나 배우를 열렬히 지지하는 팬들의 집단과 그 문화 전체를 뜻합니다. HOT, 젝스키스, S.E.S., 신화 같은 그룹들이 등장하면서 팬들이 자발적으로 조직을 만들고, 응원 방식을 고안하고, 굿즈를 만들어 나눠 갖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이야 모든 게 체계화돼 있지만, 당시에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HOT 콘서트 티켓을 구하려면 제일은행 앞에서 줄을 서야 했습니다. 온라인 예매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고, 은행 창구에 직접 가서 현금을 내고 티켓을 받는 방식이었습니다. 문제는 창구 직원의 숙련도에 따라 좌석이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같은 시간에 줄을 서도 어떤 직원을 만나느냐에 따라 앞자리가 되기도 하고 맨 뒷자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티켓팅(ticketing)에 실력이나 노력이 아니라 '운'이 개입하는 구조였던 셈입니다. 티켓팅이란 공연이나 행사의 입장권을 확보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드림콘서트처럼 대규모 행사에서는 좌석 자체가 없었습니다. 바닥에 앉아서 보는 방식이었는데, HOT가 무대에 오르면 팬들이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고 앞으로 조금씩 이동했습니다. 팬클럽 임원진이 마이크를 들고 "앞으로 오지 말라"고 외쳐도 소용없었습니다. 그 열기가 어떠했는지, 경험한 분들은 아실 겁니다. 지금의 스탠딩 구역 문화와 비교하면 안전 관리 면에서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앨범을 구하는 것도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레코드 가게(음반 판매 전문 매장)에 직접 가야 했고, 발매 당일 새벽부터 줄을 서는 게 당연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 레코드 사장님이 유독 친절하셔서 밤새 가게 안에서 기다리게 해주셨는데, 그 안에서 팬들끼리 수다를 떨고 간식을 나눠 먹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시간 자체가 팬덤 활동의 일부였던 겁니다.

티켓팅과 응원봉, 30년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나

1세대 팬덤과 현재 팬덤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두 가지가 바로 티켓팅 방식과 응원 도구입니다.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 팬덤 문화가 어떤 방향으로 진화해 왔는지가 잘 보입니다.

티켓팅의 변화만 봐도 그렇습니다. 제일은행 창구에서 무통장 입금으로 구매하던 시절에서, 온라인 예매 시스템이 처음 도입된 것은 S.E.S.의 2000년 콘서트 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PC방에 가서 크롬 브라우저를 켜고, 플러그인을 설치하고, 포털 시계를 초 단위로 확인하며 클릭 타이밍을 맞추는 방식으로 진화했습니다. 기술은 편해졌지만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응원 도구의 변천사도 흥미롭습니다. 제 경험상 HOT 시절의 응원 도구는 흰 풍선이었습니다. 콘서트 전에 팬클럽 임원진이 HOT 로고가 새겨진 풍선을 나눠주면 직접 입으로 불어서 흔드는 방식이었습니다. 신기했던 건 club HOT는 지역별로 응원봉 색깔이 달랐다는 점입니다. 부산 팬클럽은 주황색 봉을 사용했고, 평소에는 흰 풍선을 흔들다가 HOT가 등장하는 순간에만 그 봉을 꺼내 드는 방식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아날로그적이면서도 나름의 체계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공식 응원봉, 일명 '공봉'은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뉴리디(NEW LIGHTSTICK)라고 불리는 신형 LED 응원봉은 12가지 색상으로 변환이 가능하며,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과 블루투스로 연동됩니다. 공연장 전체 팬들의 응원봉이 동시에 같은 색으로 바뀌는 장면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입니다. 이 기술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흰 풍선에서 이 수준까지 왔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았습니다.

1세대와 현재 팬덤의 차이를 항목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티켓팅: 은행 창구 현금 구매 → 온라인 예매 시스템(초 단위 경쟁)
  2. 응원 도구: 직접 분 흰 풍선, 지역별 색깔 응원봉 → 블루투스 연동 12색 LED 응원봉
  3. 앨범 구매: 레코드 가게 발매일 줄서기 → 다중 버전 전략 구매 및 온라인 스트리밍
  4. 굿즈: 팬클럽 배포 기념품 → 팬 자체 제작 인형, 담요, 퍼즐 등 비공식 굿즈 시장 형성
  5. 콘서트 이벤트: 수제 슬로건 제작 → 좌석 배치 슬로건 서비스, 앱 연동 집단 이벤트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K팝 팬덤 시장은 음반 판매, 굿즈, 콘서트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특히 팬 참여형 콘텐츠의 비중이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1세대가 만들어 놓은 팬덤 문화의 틀 위에 디지털 기술이 더해진 결과입니다.

응원봉 색깔은 바뀌어도 마음은 같다

스트리밍(streaming)이라는 개념도 1세대에는 없던 것입니다. 스트리밍이란 음원이나 영상을 다운로드 없이 실시간으로 재생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요즘 팬들은 멜론, 스포티파이 같은 플랫폼에서 앨범 전체를 반복 재생하며 차트 순위를 끌어올리는 '스트리밍 총공'을 합니다. 볼륨을 1 이상으로 유지해야 스트리밍이 인정된다는 팬들 사이의 불문율도 있습니다. 헤드폰을 가방 속에 넣고 수업을 들으면서도 재생을 멈추지 않는 풍경이 지금의 팬덤 현실입니다.

저는 카세트테이프를 두 개씩 샀었습니다. 하나는 소장용, 하나는 실제 재생용이었습니다. 테이프는 오래 듣다 보면 늘어지기 때문에 그런 분류가 필연적이었습니다. 지금의 스트리밍 총공과 형태는 전혀 다르지만, 좋아하는 가수를 위해 뭔가를 '더 해주려는' 마음만큼은 완벽하게 같습니다. 이 지점이 제가 1세대와 지금 팬덤을 비교할 때 가장 인상 깊게 느끼는 부분입니다.

팬 제작 굿즈(fan-made goods), 즉 팬들이 직접 기획하고 제조한 비공식 상품 시장도 지금은 완전히 체계화됐습니다. 트위터에서 시안을 공개하고, 중국 공장에 주문을 넣고, 검수 후 개별 배송까지 하는 구조입니다. 담요, 인형, 퍼즐에 이르기까지 품목도 다양합니다. 인형 굿즈가 인기를 끌면서 인형 옷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가게까지 생겼을 정도입니다. 제가 팬덤 초기에 경험한 소박한 기념품 수준과는 완전히 다른 산업이 됐습니다.

K팝 팬덤 문화의 역사와 발전 과정을 정리한 국립국어원의 기록을 보면, 팬덤이라는 단어 자체가 2000년대 이후 한국어에 공식적으로 안착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팬덤 문화는 이제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1세대 팬덤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거칠고 과잉된 부분도 있었습니다. 드림콘서트 바닥 자리에서 앞으로 밀려가는 팬들이 그 예입니다. 지금은 시스템도 안전 관리도 훨씬 정교해졌습니다. 그러나 레코드 가게 안에서 밤새 수다를 떨던 그 온기, 풍선에 직접 입김을 불어 넣던 그 아날로그의 감각은 지금 팬덤 어디서도 찾기 어렵습니다. 그게 아쉽기도 하고, 동시에 그렇기에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돌을 향한 마음만은 세대를 불문하고 똑같다는 것,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합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tfUHSkge5wg&t=7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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